윤다발의 블로그
부산까지 걷다 - 둘째 날(2) 본문
부산까지 걷다 - 둘째 날(2)
지금 내 눈 앞에는 세 가지의 색뿐이다. 눈부신 하늘과 그 하늘을 품은 바다는 파란색, 바람에 흔들리는 숲은 초록색, 더운 열기를 내뿜느라 씩씩대는 아스팔트는 회색. 이 세가지 색만 보고 걸으니까, 점점 본다는 행위가 질려간다. 사고는 이미 멈춘지 오래고 움직이는 건 내 두다리 뿐이다.
그래도 이 때가 우리 여행 중 가장 여유로운 때였다. 지나가는 차들도 거의 없어서 우리는 나란히 걸으면서 가끔 대화를 즐겼다. 대화를 즐긴다는 표현이 좀 웃기지만 점점 말이 없어지는 우리로써는 가끔하는 대화는 일종의 오락거리다.
<끝이 없어보이는 해안 도로>
점점 배가 고파온다. 슬슬 네이버 지도에서 길 대신 건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큰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편의점도 분명 있기 마련이니까. 오후 2시 정도 되니 더위가 아주 절정이었다. 목은 마른데 물도 미지근하고 그 물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힘들다기보단 지쳐갔다. 그러다가 운 좋게 조선소 근처에 큰 편의점을 발견해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또 라면이다...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던 라면이 질려간다. 정말 본능에 충실한 식사를 하는 기분이다. 배부르기 위해서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으니까.
라면과 함께 조그만 생수도 하나 샀다. 큰물병을 들고 물달라고 하기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농협에서 한번 거절당하기도 했다.(결국 물을 받긴 했다.)
<아름답지가 않다구요>
배고픔을 해결하고 다시 걷다가 도중에 저 표지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과연 저 앞의 길들이 내게 아름다워 보일까? 혹시 내가 무전여행이 아니라면 이 길이 아름다워 보였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나에게는 그냥 '길'일 뿐이다. 저 길 한가운데에 김그림이 서 있었다면 아름다운 길로 보일수도 있겠다는 병맛같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날 좀 그만 따라 댕겨라. 77번 국도!>
어제부터 걸었던 저 77번 국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국도 하나를 이틀에 걸쳐 걸어도 못 끝내고 있다. 표지판이 '걸으면서 나를 지나친다는 건 무리야' 라고 우리를 비웃는 것 같다. 그래도 77번이라서 괜찮아... 행운의 숫자가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붙어있는 도로니까. 어제같은 행운을 오늘 밤에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면 무전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너와 함께여도 상관없어.
<부산이 89km!!!>
절로 사진을 찍게 만드는 저 이정표를 보라. 부산이... 부산이 89키로 밖에 안 남았단 말이다!!! 가끔 저렇게 보이는 이정표들은 정말 우리에게 큰 힘을 준다. 우리는 해운대까지 10키로 남았을 때는 얼마나 좋을까를 서로 얘기했다. 10키로는 남았으면 1키로씩 카운트다운 하면서 걸어야지. 아니, 뛸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원에 들려서 찰칵>
걷다보면 가끔 테마가 있는 공원들이 있었다. 사진 속의 공원은 테마가 공룡이었다. 나는 이 공원을 지나칠 때 문득 우리가 사진을 너무 안 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걷는거에만 열중한 나머지 남는건 사진뿐이라는 진리를 잊은 것이다. 남자 둘이서 사진을 찍어봐야 얼마나 찍겠냐만은 그래도 가능하면 많이 찍는게 좋다는 생각에 공원에 들어가서 한 장씩 찍었다.
그리고 이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내 다리가 점점 자외선에 익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탔다. 썬크림을 듬뿍 바른 얼굴과 팔과는 다르게 다리는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외출할때 반바지를 안 입기 때문에 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생각을 엄청 후회하게 된다.
<창원이다!!!!!!>
점점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 쯤 우리에게 하이파이브를 하게한 이정표. 창원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마산, 창원, 진해 중에서 일단 창원에 도착했다! 이상하다. 마산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어쨌거나 이때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른다.
"오늘 창원에 갈수나 있을까"
"글쎄..."
이런 대화를 아까 했었는데 말이다. 지금 우리는 발 하나만 내밀면 창원에 갈수가 있는 것이다! 기분상으로는 부산도 오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이날에서야 마,창,진이 합쳐져서 창원시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창원시의 마산합포구에 도착을 했다.
나는 오늘 어디서 잘 것인지를 네이버지도를 보면서 생각했었다. 마산에 이창캠프장이라는 곳이 있어서 찜해놨었다. 어떤 블로거가 쓴 기행문에서 마산 캠프장에서 잤다는 글을 봤었기 때문이다. 잘 곳과 씻을 곳이 있는 캠프장이라면 최고의 장소이다! 돈을 사용료로 지불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용의도 있었다. 단, 조건은 찜질방보다 비싸지 않아야 할 것. 비싸다면 차라리 찜질방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고 말지 굳이 캠프장 갈 이유는 없으니까.
이젠 확실히 밝다는 느낌보다 어둡다는 느낌이 더 강해질 무렵 캠프장 앞에 도착했는데...
"망했다."
문이 닫혀 있었다. 개인 사유지라서 출입을 금지한단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캠프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때부터 갑자기 급격하게 지쳐갔다. 목적지에 왔는데 더 걸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힘이 빠진다. 배도 다시 고파오는데 이거 야단났다. 네이버지도를 봤는데 앞으로 마을은 없고 도로밖에 안 보였다.
어깨는 이젠 확실히 아파왔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계속 걷는 것 밖에 할수 있는건 없다. 잠쉬 쉬다가 걷고 또 걸어서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잘 곳이 없었다.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버스 타자. 영민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버스를 일단 타고 가서, 먹고 자는 문제를 그 근방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정류장에 가서 우리는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몇십분동안 버스를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도 걸었다. 아침 7시쯤에 걷기 시작했고 지금 저녁 6시 정도니까 쉬는시간 제외하고 약 10시간 정도를 내리 걸은 것이다.
그런데. 버스가 안 온다. 아까 영민이가 물어봤을때 슈퍼아줌마가 곧 온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30분 이상을 기다렸는데 안 오는거 보면 버스가 끊.겼.다. 망할. 망할. 망할. 젠장. 젠장. 젠장.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결국 또 걷기로 했다. 이때 영민이가 완전 방전되었고, 내가 억지로 걷자고 설득하긴 했지만 나도 사실 걷는게 깨림찍했다. 이제 깜깜해질텐데 저 국도를 걷는게 정말 싫다. 어제의 그 위험했던 길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래도 확실히 한 시간만 걸어가면 마을이 있다는게 네이버지도로 보였기에 우린 걸었다.
<방전된 영민이 뒷모습>
우리가 걸을 땐 거의 대부분 내가 앞장 섰다. 우스개 소리로 여행 끝나고 신촌을 거닐때도 "형 앞장서."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 날은 왠일인지 영민이가 앞장설까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나는 영민이를 따라가다가 어두워지면 어제처럼 후레쉬나 켜야겠다.
그렇게 걷다가 주유소가 나왔다. 주유소 편의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식사를 해결했다. 라면만 먹기 너무 지겨워서 계란도 샀다. 그리고 후식으로 커피까지 한잔 했다. 난 여행중에서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바로 커피였다. 도중에 뒹구는 커피캔만 마도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커피..커피... 노래를 불렀었는데 결국 못 참고 자판기 커피를 먹고야 말았다.
커피를 마시니까 정말 살 것 같았다. 내친김에 화장실가서 양치와 세수까지 했다. 그러다가 화장실을 나서는데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니네들 아까 뒤에서 봤는데 여행가는 거지?"
"아. 네."
"자전거를 타면 좋을텐데."
우리와 얘기하는 사람들은 다 저런말을 한다. 안다구요. 우리도 자전거가 훨 빠르고 편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일단 자전거가 우리는 없었고, 그걸 떠나서 난 걷.고.싶.었.다.구.요오오오오~!
은근히 태워준다는 말을 하길 바랬지만, 결국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그 아저씨는 떠났다. 우리도 곧 주유소를 떠났고 얼마지나지 않아 공원을 발견했다. 그냥 개방된 공원이 아니라 학교처럼 정문이 있는 곳이었다. 저 안에 불켜진 체육관이 있었고 가끔 차들이 들락날락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딱 봐도 조금 있으면 문을 닫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딴건 생각 안한다.
"시x. 내쫓으면 나가지 뭐. 일단 들어가자."
저 안에 정자도 두어개 보인터라 일단 무조건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수레를 끌고 나오시는 분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이 곳은 24시간 열린다고 했다. 나이쓰!
정자 두어개 중 그나마 안 쪽에 있는 곳에 매트릭스와 침낭을 깔았다.
<첫 노숙이다..>
떨린다. 드디어 무전여행다운 잠자리를 갖는 구나. 침낭도 예상외로 따뜻해서 영민이도 괜찮다고 한다. 확실히 따뜻한게 괜찮았다. 날씨도 그렇게 춥지 않고 쌀쌀한 편이라서 너무 두껍지도 않은게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우린 누워 있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쩌다가 지나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긴장이 되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왔다.
<잠이 안와서 한 귀신 셀카>
그렇게 한참 얘기하다가 갑자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했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추웠다. 난 계속 이렇게 추우면 안되겠다 싶어서 저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 한번 가봤다. 좀 깨끗하면 안에서 침낭을 필려고 말이다. 그런데 너무 좁았다. 누우면 바로 소변기가 머리맡에 있을 정도니까. 우웩. 여기서는 못 자겠는걸?
추우면 그때가서 생각해보자 하고 다시 정자로 돌아와 침낭을 머리까지 올리고 잤는데 너무 따뜻했다. 음. 추울리는 없겠네. 너무 만족하면서 다시 슬슬 잠이 들려던 찰나.
"형. 누구 온다. 경빈가봐."
안경을 벗은 상태여서 잘 안 보였는데 누가 후레쉬를 비추면서 서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경비인 것 같다. 우리를 내쫓으려고 하나? 정말 별에별 생각이 다 들었다. 쫓겨나면 저 멀리 보이는 육교 위에서라도 자야겠다고 맘 먹고 그냥 누웠다. 그런데 경비가 그냥 갔다. 십년 감수했네. 제발 무사히 오늘 밤을 보냈으면.
* 둘째 날 이동 거리(약 33km) *
* 둘째 날 지출 내역 *
컵라면 2개 + 물 + 계란 + 커피 2잔 = 3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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